모두 모였다. ‘즐거운 활동 리스트’를 받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체크를 하는 시간이었다. ‘식물 가꾸기’, ‘헤어샵 가기', ‘편안하게 쉬기', ‘영화 보러 가기', ‘조깅을 하거나 걷기', ‘빈둥거리기', 등 하고 싶은게 43개 정도 되었다. 그러자 옆에 계시던 분이 “와 지윤씨는 43개나 되는군요. 나는 3, 4개?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더라고.”라고 하셨다. 무기력증이란 그런 것이지, 끄덕였다. 하지만 아직 채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하여 “아, 네" 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.

‘감정회복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바꾸기’라는 주제로 이뤄지는 수업에서는 최우선으로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. 영양이 균형 잡힌 음식을 먹고, 적어도 7~9시간 정도 잘 자고, 매일 20분 이상의 운동을 하라 했다. 아프면 바로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. 그리고서 즐거운 활동 리스트에 있는 것을 차례차례 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였다.

늘 하고 싶은 게 많았다. 그런 것치고 지금 내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. 회사 일과 집에서 쉬기를 번갈아 가며,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는 중이다. 그래도 집에서는 한 끼 정도 요리해 먹으려고 노력한다. 또 짬을 내면 근근이 운동을 하고, 코딩 연습을 하고, 아주 가끔 책을 읽는다. 자기 계발 같은 것은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다.

이전에는 조금 더 대단한 것을 하고 싶었다. 또 그것들을 잘하고 싶었다. 그래서 세상에 필요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.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갈 것은 알면서도. 하지만 이 정도로 잘 돌아갈 줄은 몰랐다. 그러한 점도 이제는 “그럴 수 있겠거니" 하고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. 그리고 난 장점과 한계를 모두 지닌 존재라는 것도 받아들여야만 했다.

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누운 채로 휴식과 잠을 자서 피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한다. 그러나 잠은 불행을 지울 수 없다. 그래서인지 누워서 하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. 코딩을 잘하는 나, 사진을 잘 찍는 나, 운동을 잘하는 나. 그때 누군가 들어왔다. “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는 노력을 포기하고,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때 새롭고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. 그것이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지요.”

<Highly Sensitive People, 센서티브>의 저자 일자 샌드는 ‘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문이 열리는 게 인생'이라고 했다. 이것을 수용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. 이 문이 닫혔으니, 나갈 틈새 하나 없었고 틈을 파고드는 빛 역시 없어 보였다. 희망 없는 현실에 내던져져 있었다. 그러나 일자 샌드는 그 와중에도 “희망과 불가능한 소망"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. should와 wish를 구분하는 일이 그 일환이다. 조금 더 또렷하게 생각해야 한다. 자기연민이나 죄책감을 거둬내는 것도 필요하다. 직접 하지 않은 일이나 실제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, 그건 과도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. ‘나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'고 착각하기 때문에. 죄책감은 무력감과 슬픔에 대한 방어수단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. 이럴 때는 나 자신은 남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연민을 행할 수 있다. “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어. 그렇지만 이것도 괜찮아.” 쉽게 좌절되는 꿈 앞에서 자신에게 이 정도의 응원은 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.

하고 싶은 게 많은 만큼 좌절도 많고, 실패가 많았던 만큼 절망을 많이도 쌓아왔다. 아주 커다란 슬픔 앞에서는 조금 더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와, 이 방에서도 더는 나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.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서.

어둠 속에는 더 깊은 어둠이 있다. 어둠을 골라내어 조금이라도 더 흐린 점을 찾으면 문손잡이를 돌리는 연습을 했다. 그리고 힘에 부치더라도, 가능한 한 크게 발을 굴러 그 방에서 뛰쳐나오는 일을 지난 한 해 동안 반복했다. 방 밖을 나가면 또 다른 방이 있었지만, 포기하지 않았다. 그렇게 점점 따스한 양지로 나와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