우리도 아이였던 적이 있다. 그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넘어지고 사랑을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곤 했다. 넘어졌을 때 달려가 안길 수 있던 아이, 없던 아이 모두 어른이 되었다. 허우대 멀쩡한 성인으로 살다가도 종종 아이의 모습을 한다. 책상 앞에서 멍하게 핸드폰을 뒤적거리는 아이,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서 좌절스러워하는 아이, 이불을 차 버리며 낮에 있었던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이 모두 일상에서 쉬이 볼 수 있다.

나는 불안한 아이에서 키가 훌쩍 커버렸다. ‘지금 바라고 있는 이 일이 잘 안되면 어떡하지?’, ‘친구들에 비해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?’, ‘휴가나 휴식은 사치야. 더 공부해야 돼.’ 같은 생각을 종종 한다. 그런데 10년 전에도 그랬다. ‘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떡하지?’, ‘학원 숙제를 못했는데 놀다니. 말도 안 돼. 실망스러워.’, ‘연습이 덜 된 것 같아. 손목이 다치기 전까진 연습해야 돼.’ 열심히 하고 있을 때도 불안해했고, 열심히 하지 않을 때도 불안해했다.

어떤 사람들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. 처음에는 도우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지만 마지막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대방을 교묘히 기만하는 ‘가스라이팅’을 한다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. 그러나 그들이 가스라이팅을 한 건 아니다. ‘다 지윤이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.’ 라는 말과 달리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, 담담하게 임할 수 없게 되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 말에 휩쓸렸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. 물론 실제로 의도가 악한 사람에 의한 가스라이팅도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 다룰 거리는 아니다. 무엇보다 내 주위 사람들이야말로 나쁜 목적을 갖고 일부러 세게 말한 건 아닐 터. 아마 그들의 말마따나 속마음도 ‘너 잘 되라고 나라도 쓴소리 하는 것’이었다고 여긴다.

종종 ‘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’의 딜레마에 빠진다.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인 건 진심인 듯한데, 그 말이 내 자기 효능감 등을 상실시킬 때가 있었다.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때도 많았다. ‘내가 과연 엔지니어로 잘 성장할 수 있을까?’, ‘나에게 엔지니어의 자질이 부족하다면?’, ‘내가 여자라서?’, ‘부족하지 않다면 왜 그 문제를 풀지 못했을까?’, ‘다른 친구는 단번에 틀린 이유를 찾았는데? 나랑 그 친구는 뭐가 다른데?’

사실 이 질문들의 속 뜻은 ‘내가 엔지니어로서의 소양이나 실력이 부족한 것 같다. 그래서 불안하다.’는 것이다. 그러나 나 자신을 포함해, ‘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'을 하는 사람들은 이 불안의 크기를 줄이려 노력하지 않는다. 모두 다 ‘어떻게 하면 훌륭한 엔지니어가 될 수 있는지’를 일장 연설하고, ‘왜 그 문제를 풀지 못했을지’ 이유를 분석한다. ‘이렇게 했어야지' 말하기도 하고, ‘다음번에는 그렇게 하세요.’라고 말하기도 한다. 그래서 쌍방 모두 진심으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었다고 하더라도, 불안에 가득 찬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려버리거나, ‘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'을 하는 사람은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로 오명을 쓰게 된다.

그렇게 도움을 주려던 사람은 ‘말을 얹기가 무섭다.’라는 방어기제가 동원되어 주저하게 된다. 또 도움을 받고 싶었던 사람은 '말해서 뭐 하나'하고 주위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대기도 한다. 도움을 주고 싶고, 도움을 받고 싶다는 간단명료하면서 선한 의도로 시작한 대화가 어쩌다 이 파국으로 치달은 것일까? 이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은 바로 공감의 부재에 있다.

공감과 해결은 상호보완적이지만 둘 중 어떤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.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행해져야 한다. 예를 들어 나는 이따금씩 아주 큰 일을 앞두고 며칠씩 긴장하곤 하는데, 이로 인해 잠을 잘 못 자고 그 결과 컨디션이 계속 나빠져 작업 퍼포먼스가 잘 나오지 않게 될 때도 있다. 이때 가까운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고생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짐을 덜어주려고 한다. 그 모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.

  1. (해결) “잠을 좀 자야겠구나. 병원에 가서 근육이완제나 항불안제를 처방받는 것은 어때?”
  2. (해결) “카모마일 차를 우려 줄게"
  3. (공감) “힘들겠다.”
  4. (공감) “나는 널 믿어. 잘할 수 있을 거야.”

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. 1번이 나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고 3번이 그다지 도움이 안 될 때도 있다. 머릿속이 복잡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해결책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, 옆에서 ‘힘들겠다'라고 하면 답답하다. 반대로 4번처럼 지지의 말이 필요한데 2번처럼 카모마일 차를 대령하는 사람도 있다. 그럴 때면 ‘다 나 잘되라고 주는 건데 거절할 수도 없고. 고맙긴 한데.'라며 뜨뜻미지근하게 받아 홀짝인다. 어느 때 공감과 해결을 적시에 내밀어야 하는지는 눈치 빠른 사람들이야 잘 알겠지만, 실은 눈치 빠른 사람조차도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. 결국 해결형 인간, 공감형 인간 모두 어려움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측정해야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측정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. 눈치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능력이다.

따라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이 가진 불안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다. 어떤 사람이 누군가와 다투고 나서 커다란 감정에 짓눌려 울분을 터뜨리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“걔가 일부러 그랬겠니?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.”라고 한다면 더 화가 날 것이다. 그럴 때는 상대방의 의도를 대신 전달해주려는 노력이나 해결책은 통하지 않는다. 대신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. “화나겠다. 나 같아도 그 말을 들으면 그런 반응이 나올 것 같아.”, “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! 그건 그 사람이 너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.”, “나는 그 사람과 생각이 달라. 나는 네가 잘 해낼 것이라 생각해.”라는 말을 하면 감정의 크기가 줄어든다. 그 뒤에 필요에 따라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. “그 친구한테 네 마음을 말해보는 게 어떻니?”, “프레임워크를 여러 개 사용할 줄 아는 것만으로 실력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어. 컴퓨터 공학 기초 지식을 늘려가면 어떤 프레임워크나 서비스를 맞닥뜨려도 트러블슈팅이 가능하게 될 거야.”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이나 분노 같은 마음이 클 때는 공감으로 감정을 누그러뜨려야, 해결에 대한 고민이 오고 갈 수 있다.

오랜 시간 함께 알고 지낸 사이더라도 감정의 크기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. 더군다나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거나 말투가 정중하거나 드라이해서 나에게 정말 해결책을 묻는 것이라 생각이 들면 당연하게도 ‘해결책'을 먼저 제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. ‘말을 말고 말지. 어차피 이 대화의 결과가 어떻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.’라고 생각하기보단, 우선은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살짝 시도해보기를 권한다. 해결책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이면 가벼운 해결책을 제시해보자. 이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거나,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하게 화를 낸다면, 태도를 바꾸면 된다. ‘아차차.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은 우선 해결은 아니었구나. 먼저 공감을 해주자’.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,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태도를 수정해나가는 것이다.

사람들은 내가 공감능력이 뛰어난 엔지니어라고 한다. 그런 나조차도 공감보다 해결책을 먼저 내밀곤 한다. 응원의 말 한마디를 건네기보다 정신과 예약을 함께 잡아주려 할 때가 있다. 그리고 나 자신도 그렇게 대한다. 상황이 심각할수록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. 그러나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야 한다는 웃어른들의 말씀이 맞다. 어떤 사람들은 감정의 크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병원을 가기는커녕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.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끌고 병원에 가는 것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는 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. 아무리 ‘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’이더라도 불안 같은 감정의 크기가 너무 클 때는 그 말이 오히려 날카로운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.

그리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내가 건네는 공감이나 해결 같은 게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. 실패할 수 있고, 사실은 실패해도 된다. 시종일관 내 규칙이나 틀에서 이 사람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해놓고 ‘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'라고 하기보다, 예상한 반응이 아니면 방법을 바꿔보는 것이다.